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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에서는 전쟁 승리 후 데려온 전쟁 포로들을 검투사 경기에 투입하여 로마 시민들의 오락거리로 만들었고, 스파르타쿠스와 노예 검투사들은 힘든 훈련 과정과 가혹한 생활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의 반란은 성공하는 듯했으나 내부 분열과 해적의 배신으로 인해 결국 로마 정규군에게 패배했습니다.
검투사의 유래와 변천, 검투사의 유형
검투사의 영어 표현 글래디에이터는 글라디우스 검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글라디우스는 당시 로마 군대의 보병들이 주로 사용하던 검을 말합니다. 글래디에이터는 보리 먹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르데아리라고도 불렸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보리는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검투사를 가축의 사료를 먹는 사람들이라고 비하하는 말이었습니다. 검투사는 고대 로마의 장례식에서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검투 경기를 펼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전쟁 포로는 주로 갈리아와 스위스, 네덜란드 지역,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의 삼니움 지역에서 로마 제국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전쟁 포로들은 로마의 노예 시장을 통해서 검투사 양성소로 팔려가서 검투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검투 경기는 로마의 시대에 따라 성격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검투사의 종류는 출신지, 무기, 공격 방법에 따라서 나눌 수 있습니다. 출신지에 따라서는 트라키아 검투사, 갈리아 검투사 등으로 나뉘었습니다. 무장에 따라서는 베스티아리, 레티아리우스, 무르밀로, 세쿠토르 등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베스티아리는 창을 들고 맹수와 싸우는 검투사로 2급 검투사였고, 본격적으로 검투사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오전 경기를 담당하였습니다. 베스티아리의 상대로 사자, 하마, 불곰, 호랑이, 타조 등 다양한 동물들이 검투사 경기에 투입되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가장 사랑했던 검투사는 레티아리우스로 그물 검투사 또는 어부 검투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상징물인 삼지창을 무기로 사용했으며 다른 한 손에는 그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방패 대신에 허리와 오른팔에 방어구를 착용했습니다. 레티아리우스는 투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외모가 준수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물고기 검투사라고도 하는 무르밀로는 물고기 모양의 투구를 쓰고 비늘처럼 보이는 보호장구를 팔에 착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굉장히 큰 방패와 투구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무르밀로는 무거운 방패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힘이 세고 건장한 남성이 주로 투입되었습니다. 세쿠토르라고 하는 추격 검투사는 두 눈이 보이는 투구를 사용했습니다.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와 반란 과정
노예 제도가 가장 발전했던 나라는 아테네와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전쟁 포로들이 로마 사회로 유입되었고, 그들이 로마 사회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경에 고대 로마의 총인구 수가 450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 약 33%에 달하는 150만 명이 노예였습니다. 노예들이 고대 로마 사회를 지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 이후 속국으로부터 값싼 농산물들을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값싼 농산물이 유입되면서 로마의 평민과 자영농들이 가장 큰 타격받았습니다. 자영농은 몰락했고, 대농장만 살아남았습니다. 고대 로마의 대농장을 '라티푼디움'이라고 하는데 라티푼디움은 노예 없이는 경영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이 가속화되면서 사회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시칠리아는 라티푼디움이 가장 많은 지역 중의 하나였고, 따라서 노예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시칠리아에서 1차와 2차 노예 반란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한편, 로마 제국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대중들이 좋아하는 검투사 경기를 제공했습니다. 검투사들은 훈련 과정이 매우 힘들고 모욕적인 일상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3차 노예 반란인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아탈리아 중심부에 있는 카푸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에서 훈련을 받던 스파르타쿠스가 크릴수스와 함께 검투사들을 규합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검투사들은 카푸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에 베수비오산으로 달아났는데, 당시 베수비오산은 숲으로 뒤덮여 있어서 숨기에 좋았습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군이 베수비오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에 있는 농장의 노예들이 이곳으로 합류했습니다. 74명으로 시작한 스파르타쿠스 반란은 점점 7만여 명의 대규모로 확대되었습니다. 로마의 토벌대가 왔지만 토벌대들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군들은 로마 정규군까지 격파했습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결과
스파르타쿠스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합류했습니다. 크라수스는 훗날 제1차 삼두 정치를 담당했던 한 사람으로, 당시 로마 최고의 갑부였으며 많은 병사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당시 스페인에서 전쟁으로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병사들이 신임하던 장군이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군의 양대 세력은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트라키아인들과 부지휘관인 크릭수스를 비롯한 갈리아인이었습니다. 이 두 세력은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그의 고향인 트라키아로 돌아가고자 한 반면, 크릭수스는 이 기세로 로마를 더 약탈해서 그 부를 검투사들이 나누어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두 세력은 각자 길을 가기로 하고, 크릭수스는 7만 명 중에서 3만 명과 함께 반란군을 떠났고, 그 후 로마의 정규군에게 완전히 격파당했습니다.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4만 명의 노예 반란군들은 알프스산까지 갔다가 갑자기 돌아섰습니다. 그들이 돌아선 이유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이유를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트라키아는 당시 로마 땅이었으므로 돌아간다고 해도 정착하기 어렵다는 것과 검투사들이 따뜻한 지역에서 전쟁 포로로 온 노예들이 많아서 알프스산의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따뜻한 남쪽 시칠리아로 향했습니다. 시칠리아는 대농장이 발달해 있어서 노예들이 많았고, 스파르타쿠스와 반란군은 그 노예들과 힘을 합친다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알프스산으로 북행했던 4만 명의 스파르타쿠스 반란군들은 남하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시칠리아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해적들에게 타고 갈 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해적들의 배신으로 반란군들은 메시나 해협의 항구에 갇혔습니다. 반란군들을 토벌하러 온 크라수스는 이탈리아 반도 끝부분에 방벽을 만들어서 그들을 가두었고, 반란군들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정규군이었던 크라수스 부대에게 패배했습니다. 남은 반란군은 폼페이우스 군대에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미완으로 끝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1,800여 년이 지난 후 아이티에서 부활했습니다. 쿠바 남쪽 카리브해에 있는 작은 섬 아이티는 세계 최초로 흑인 노예들이 혁명으로 탄생시킨 나라입니다. 18세기 아이티 노예였던 독립운동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는 검은 스파르타쿠스로 불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