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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하급 귀족의 아들에서 프랑스 황제까지 된 프랑스의 영웅이었으나 그동안 얻은 전쟁 승리의 자신감으로 러시아 원정을 단행하면서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하게 된 배경과 러시아 원정의 과정, 그리고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인한 나폴레옹의 몰락을 살펴봅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배경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작은 섬에서 평민과 비슷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파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프랑스혁명 때 큰 공을 세우면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04년에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하고, 이후 권력에 도취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치른 전쟁에서 승리했고, 프랑스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가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배를 하고 난 후 나폴레옹은 영국을 굴복시키는데 집중했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영국을 제압할 수 없게 되자 경제적으로 영국을 압박하기 위해 1806년에 대륙 봉쇄령을 단행했습니다.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유럽의 어느 나라도 영국과 무역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농업 중심의 산업국가로, 공산품을 수입하기 위해 유럽이나 영국에 농산물을 수출해야 했기 때문에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결국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영국과의 교역을 재개하였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를 처벌하기 위해 러시아 원정을 결정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시작
그 당시 그의 많은 참모들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전쟁의 승리로 얻은 자신감으로 러시아 원정에 확신을 가지고 단호하게 대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3개월 안에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전쟁에 필요한 보급품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대 병력을 동원했는데, 프랑스 정예군 20만 명과 독일, 폴란드 등의 연합군 40만 명으로 이루어진, 총 60만 명의 군인을 유럽 각 국에서 차출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보급품은 모두 고갈되었고, 그 과정에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약탈을 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연합군의 충성도는 낮았기 때문에 이탈자도 많이 발생했습니다. 나폴레옹은 6월에 60만 명의 병력으로 출발했는데, 러시아의 여름은 굉장히 더워서 군인들은 탈진하거나 열사병으로 사망했으며 그로 인해 탈영병이 속출했습니다. 그래서 네만강을 건너는 동안 나폴레옹의 병력은 25% 감소했습니다. 보급선이 길어질수록 프랑스군은 더 불리해졌지만, 러시아군도 프랑스군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전략은 싸우지 않고 후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1세는 쿠투조프를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드디어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쿠투조프와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보로디노는 모스크바에서 12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 근처까지 도착했다는 의미였고 러시아는 보로디노에서 프랑스에 가능한 큰 타격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끝없는 포격으로 인해 처절한 전투가 이어졌고, 러시아군이 퇴각하면서 보로디노 전투는 끝이 났습니다. 러시아 측 사상자는 4만 5천 명이었고, 프랑스군의 피해는 포탄 12만 개와 탄약통 30만 개를 소실했고, 병사 2만 8천 명이 전사했으며 부상자는 3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전쟁 중에는 심한 부상자를 그 자리에 두고 갈 수밖에 없는데, 부상자가 모두 사망했다고 보면 프랑스군은 6만 명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보르디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러시아는 항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입성과 퇴각, 그리고 몰락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모스크바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모스크바가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모스크바의 대화재는 9월 15일부터 9월 20일까지 이어졌고, 프랑스 군대는 불 끄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모스크바 화재는 당시 모스크바 총독인 로스토프친 백작에 의한 고의 방화로 보는 것이 현재의 유력한 학설입니다. 쿠투조프 사령관은 모스크바 부근의 집에서 전략을 세웠는데, 전략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프랑스군을 굶겨 사망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군의 수중에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도록 러시아는 후퇴를 거듭하면서 식량과 가옥을 모두 태웠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모스크바에서 35일간 체류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한 후에 알렉산드르 1세가 화평을 청해 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것은 나폴레옹의 오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우위를 점하고 협상해서 성공을 거두려고 했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화친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협상을 거부했고, 결국 나폴레옹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월 19일에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퇴각을 시작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한 군인들은 11월 중순이 되자 10만 명 중에 4만 명만이 남았습니다. 추격자 쿠투조프는 베레지나 강에서 프랑스군을 전멸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가지 못하게 베레지나 강에 있는 다리를 폭파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42명의 전투 공병이 영하 30도의 물속에서 2개의 부교를 건설하여 4만 명의 군인이 후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전투 공병들은 부교 건설 후 탈진해서 모두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프랑스 사람들은 베레지나 전투의 전투 공병을 잊지 않고 추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군이 후퇴하는 동안에 겨울이 다가오면서 추위가 점점 심해졌고 추위, 영양실조, 전염병으로 인해 죽음의 행군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괴롭히는 '코사크 기병대'까지 있었습니다. 러시아 남부에 있는 코사크 기병대는 러시아로부터 자치권을 얻어서 살았는데, 러시아가 외부와 전쟁을 할 때 도와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잔인하고 용맹한 코사크 기병대 수만 명이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를 공격해서, 프랑스 군대는 3만 명만이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나폴레옹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켰던 두 명의 명장이 있었는데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 드 보아르네와 미셀 네 장군이었습니다. 미셀 네 장군은 가장 마지막으로 러시아 땅을 떠난 프랑스인이었습니다. 1814년 3월 31일에 러시아, 프로이센,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참가한 반프랑스 동맹군이 파리에 입성했고, 나폴레옹은 크게 절망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성에서 양위한 후 엘바섬으로 추방당했고 이후 탈출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국에 의해서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세인트 엘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