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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루이 14세는 프롱드의 난을 겪으며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생긴 귀족들에 대한 반감으로, 귀족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며 절대 권력을 가진 왕으로 거듭났습니다. 루이 14세가 만든 베르사유 궁전은 그에게 더욱 강력한 왕권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루이 14세의 불행한 어린 시절

루이 14세는 아버지 루이 13세와 어머니 안 도트리슈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왕실에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안 도트리슈는 유럽에서 손이 가장 예쁜 여인으로 소문나 있었으며 하얀 피부와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아이들이 유년기를 지나면서 사망했는데, 여자 아이처럼 옷을 입히면 오래 생존할 수 있다는 속설에 따라 루이 14세는 어린 시절에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루이 13세가 30년 전쟁을 하던 중 4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자, 다섯 살이었던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 추기경이 섭정을 맡았습니다.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 추기경은 모두 프랑스인이 아닌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은 이 두 사람의 섭정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안 도트리슈는 스페인 출신이었고, 마자랭 추기경은 이탈리아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법원 귀족과 30년 전쟁의 영웅 콩데를 중심으로 한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 추기경이 섭정을 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이 국가 재정이었습니다. 루이 13세가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텅 비게 된 국고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 추기경은 당시 면제 대상이었던 파리 고등법원의 법관들과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파리 고등법원의 법관들과 귀족들이 반발했고, 두 외국인의 섭정에 불만을 가졌던 파리 시민들이 가담하면서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1648년~1653년 까지 5년 이상 지속된 프롱드의 난은 루이 14세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어린 루이 14세는 파리를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프롱드 난이 일어났던 파리는 그에게 악몽만 남겼습니다. 오랜 프롱드의 난으로 지치고 불안에 떨던 파리 시민들이 강력한 군주를 원하게 되면서 루이 14세는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661년에 섭정을 하던 재상 마자랭이 사망하면서 루이 14세는 그의 나이 22세에 비로소 직접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절대 군주 태양왕 루이 14세의 치세

루이 14세는 직접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과거에 자신을 괴롭혔던 귀족들에 대해 반격을 준비했습니다. 1664년에 그는 귀족 조사 사업을 진행하여 귀족들에게 자신이 귀족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이 사업으로 귀족 가문은 스스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국왕으로부터 인정받아야 존립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귀족들을 감시하고 통제했습니다. 그는 사치와 향락을 제공하는 동시에 채찍과 당근을 주는 정책으로 귀족들을 길들여 나갔습니다. 루이 14세는 프롱드의 난으로 파리를 싫어해서 떠나고 싶어 했는데 베르사유가 그 대안이 되었습니다. 그가 베르사유 궁전의 모델이 된 푸케의 보르비콩트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르비콩트성은 베르사유 궁전을 짓는데 영감을 주었습니다. 재무장관 니콜라 푸케는 루이 14세보다 돈이 더 많은 부자였습니다. 재상이었던 마자랭이 사망하자 재무장관보다 더 높은 재상이 되고 싶었던 푸케는 루이 14세를 자신의 집인 보르비콩트성으로 초대했습니다. 보르비콩트성을 본 루이 14세는 푸케가 왕보다 더 화려한 궁전에서 사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루이 14세는 푸케를 부정축재의 죄목으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푸케는 18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추방당했고, 그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루이 14세는 보르비콩트성을 지을 때 참여했던 모든 장인을 불러들여서 푸케의 보르비콩트성보다 더 뛰어난 성을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건축가 루이 르보와 쥘 망사르, 화가 샤를 드브링, 조경 설계사 앙드레 르노트르가 참여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성이 베르사유 궁전이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수많은 당대 프랑스 거장들의 합작품이었고, 그 후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은 프랑스의 정치, 경제, 예술적 성공의 과시 공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거울을 구하기 굉장히 힘들었는데, 73m 길이의 거울의 방은 아치형의 아케이드 17개와 수백 개의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건물의 천장에는 그리스 신화가 그려졌는데, 거울의 방 천장에는 루이 14세의 앞선 17년 간의 영광스러운 장면들을 천장화에 담았습니다. 천장화를 보려면 고개를 들어 올려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루이 14세를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거울의 방은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루이 14세가 태양왕으로 불린 이유

루이 14세는 발레리노였습니다. 그가 15세에 쁘띠 부르봉 극장에서 '밤의 발레'라는 작품을 공연하면서 주인공인 태양신 아폴론 역할을 맡았고, 귀족들은 조연과 엑스트라 역할을 했습니다. 이 발레 공연으로로 인해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루이 14세에게 발레는 곧 권력이었습니다. 그가 태양신으로서 귀족들을 발아래에 무릎을 꿇리면서 그의 힘을 과시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의 아름다운 정원은 1,400개의 분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마차를 끄는 아폴로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루이 14세는 태양신 아폴론의 동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루이 14세는 귀족들을 감시하기 위해 귀족들과 그 가족들에게 베르사유 궁전으로 입주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귀족들은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가게 되면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는데 소홀하게 되어 귀족 세력 기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사교의 중심인 베르사유 궁전에 가지 않는다면 지방 소귀족으로 전락하게 되므로 귀족들은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이 14세는 귀족들을 분열시키고 경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루이 14세는 복잡한 의전을 만들어서 눈에 보이는 모든 의전을 귀족들의 특전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귀족들은 그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나 왕과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순위가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귀족마다 서열을 매겨서 고유의 에티켓을 부여하여 귀족들을 관리하고 통제했습니다. 반면에 루이 14세는 매일 저녁에 춤과 음악, 도박을 허용했고귀족들은 문란한 생활 속에서 루이 14세에게 대항할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한편 루이 14세 시대에는 세련된 프랑스 왕실의 법도가 유럽 전역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프랑스어는 유럽 상류 사회의 주류 언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불운한 노후를 보냈습니다. 그의 아들은 천연두로 사망했고, 그의 손자와 며느리는 홍역으로 사망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영광을 추구했던 루이 14세는 72년의 치세 동안 절반 이상을 전쟁터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개신교를 탄압한 큰 실책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중에서 칼뱅파를 믿는 개신교도를 위그노라고 했는데,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도록 했습니다. 위그노들은 상공업자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프랑스를 떠나게 되면서 프랑스는 경제적인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위그노들이 도착한 네덜란드는 이때부터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루이 14세가 태양왕으로서 베르사유 궁전에서 만들었던 절대 왕정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은 1789년에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무너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