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민주주의는 그리스의 작은 도시 국가인 아테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와 아테네 민주주의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페리클레스의 업적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

그리스는 80%가 산악지대이며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는 산지가 많아서 통일 국가를 세우기가 어려웠고, 폴리스라고 하는 독립 국가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리스 본토에 100여 개의 폴리스가 있었고, 그리스 식민지까지 합치면 1,000개가 넘는 폴리스가 있었습니다. 많은 폴리스 중에서 유명한 것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입니다. 아테네의 제일 위에는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아크로폴리스 중앙에 신전 파르테논이 있습니다. 신들의 영역 아래에는 시장, 민회, 시민 법정 등이 있는 아고라가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자 민주주의 교육의 장이었던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습니다. 제우스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포도주를 주관하는 신이고 연극의 신, 농민의 신, 시민의 신이었습니다. 주로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공연된 연극은 비극이었고, 시민들은 영웅들의 비극이나 영웅들의 삶을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연극이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토론과 비평을 진행하였습니다. 아테네의 경우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이 아테네 시민들을 교육했습니다. 디오니소스 극장의 수용 인원은 약 17,000명 정도였는데, 아테네 시민만 30,000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아테네 시민의 절반 이상이 극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시의 이름이 아테네인 이유는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대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도시의 수호신이 되기 위해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경쟁을 벌였습니다. 시민들은 도시에 가장 필요한 선물을 주는 쪽을 도시의 수호신으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포세이돈은 바닷물과 말을 가져왔고, 아테나는 올리브 나무를 가져왔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아테나 여신이 가져온 올리브 나무를 선택하여 아테나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후 그리스 전역에 올리브 나무가 풍성하게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아테네는 산악지대라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올리브기름을 만들어서 이웃 나라에 수출하고 곡물을 수입했습니다. 그리고 올리브기름을 수출할 때 담는 용기가 필요함에 따라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역은 배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박도 필요하게 되면서 조선업과 해운업이 발달했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

아테네 민주주의는 라브리온 은광의 발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라브리온 지역에 수많은 은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시민들은 은광의 수익을 놓고 토론을 했습니다. 수익을 분할해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돌려달라는 의견과 페르시아 공격에 대비하여 함선을 건조하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함선 건조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아테네 시민들은 함선을 건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덕분에 2년 후 페르시아가 쳐들어왔을 때 아테네 해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200척의 함선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의 해군을 이끌고 승리했습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공동체를 지켜냈다는 아테네 시민들의 자부심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발전은 아테네 해군에 기인합니다. 아테네 시민에게는 국방의 의무가 있었는데, 고대 아테네 인들은 갑옷과 무기를 직접 준비해야 했습니다. 말을 살 수 있는 귀족들은 기병이 되었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중장 보병이나 경장 보병이 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무기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잡이가 되었습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던 노잡이들이 정치적 지분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아테네 민주주의 발전의 시작이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완성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기존의 4 부족 체제가 지연과 혈연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발전이 안된다고 여기고, 4 부족 체제를 10 부족 체제로 개편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10 부족에서 50명의 대표를 선발하여 500인 평의회를 구성하였습니다. 평의회가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500인 평의회에서 하는 일은 민회에서 토론하고 결정할 안건을 준비하고, 재무관과 행정관의 선출을 감독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아테네에는 도편 추방제라는 탄핵제도가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도편에 투표해서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추방하는 것이었습니다. 6,000표 이상을 받은 사람은 10일 내에 추방당하고 10년 동안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추방 기간 동안 아테네에 들어오면 사형당했습니다. 하지만 도편 추방제의 문제점은 라이벌을 추방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편 추방을 당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인 테미스토클레스와 귀족파의 대표였던 키몬이 있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이들이 오만함에 빠져서 독재의 길로 들어설까 봐 도편 추방제를 실시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페리클레스의 업적

그리스 여권의 표지 안쪽 면에 페리클레스의 연설 장면이 실려 있습니다. 아테네 최고의 권력기관은 에클레시아라고 불리는 민회였는데, 민회를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이 페리클레스였습니다. 에클레시아는 '밖으로 불러내다'라는 뜻으로, 아테네 시민들을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민회에서 아테네의 모든 공무가 논의되고, 토론을 통해 결정되었습니다. 민회가 열렸던 프닉스에서는 모두에게 발언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민회는 1년에 40회가 열렸는데, 9일에 한 번 정도 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자기 소신이 있고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이 아테네의 정책에 반영되었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황금기는 페리클레스 시대였습니다. 500인 평의회 의장의 임기는 하루였고,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나 원하면 평의회 의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장군이라 불리는 스트라테고스는 국방과 행정을 담당했던 사람으로 선거로 선출되었고 임기가 1년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32년 동안 스트라테고스로 지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페리클레스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도편 추방으로 추방당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수사학을 배워서 웅변에 탁월했습니다. 그는 디오니소스 극장의 입장료를 정부가 부담하여 무료화하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연극 관람을 해서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침략에 대비해서 모은 동맹 기금을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기고 그 기금으로 파르테논 신전을 지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건설에는 수많은 노동자 필요했고 일자리 창출에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배심원에게 수당을 지급하여 시민 법정 활성화시켰습니다. 또한 아르콘의 자격 기준을 하향 조정해서 일반 시민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권력이 민중에게 돌아갔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제한된 민주주의라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