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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의 성지로,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이 점령한 예루살렘을 교황의 십자군이 정복하기 위해 20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었습니다. 2차 십자군 전쟁 때 등장한 이슬람의 쿠르드족 살라딘은 정의로운 신앙이라는 이름의 의미처럼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보여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리처드 1세는 살라딘에 맞서 2차 십자군을 이끌었고 살라딘과의 협상을 통해 2차 십자군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하게 된 이유와 1차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은 성지 예루살렘을 두고 유럽 기독교 왕국과 이슬람 제국 간의 200년 간 이어진 전쟁을 말합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길고 참혹했던 전쟁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교의 성지인 통곡의 벽이 있고, 그 뒤에 무함마드가 승천한 장소인 바위의 돔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예수가 묻히고 부활한 장소인 성 분묘 교회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던 골고다 언덕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은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의 3대 종교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것이 12세기에 유행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성지 순례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플의 어머니 헬레나였습니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성 분묘 교회를 지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지 순례를 떠나려면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야 했는데 이는 중세 봉건 사회가 안정되면서 가능해졌습니다. 예루살렘은 동방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던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때 많은 물품들을 가져와서 유럽에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중앙아시아에 있던 셀주크 튀르크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중동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면서 그들은 기독교의 성지 순례를 금지하고,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은 동로마 황제가 황제이면서 동시에 교황인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황은 이교도들로부터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주도하는 동시에 동로마 황제와 봉건 영주, 주변 왕들의 지위를 약화시켜서 가톨릭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습니다. 또한 11~12세기에는 유럽의 봉건 사회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십자군을 모집하여 호전적인 기사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려서 내부를 결속하고자 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연설을 통해 많은 십자군을 모집했습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선동적인 연설을 잘하는 교황이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항상 죄를 짓는다고 생각했는데, 십자군 행렬에 동참하는 것은 속죄를 하고 구원을 받는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1차에서 8차까지 이어졌습니다.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은 종교적 열정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 아나톨리아 반도를 거쳐 중동 지역의 예루살렘까지 도착하는 데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십자군은 보급품이 소진되면 약탈을 했는데 원정길에 있는 나라들은 모두 기독교 국가들이었습니다. 예전에 그곳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 약탈과 방화, 폭력이 넘쳤다고 합니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나서 그들은 십자군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2차 십자군 전쟁과 살라딘의 등장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살라흐 앗 딘은 정의로운 신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중동의 소수 유목 민족으로 이란, 이라크, 터키 쪽에서 유랑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 쿠르드족이 있는데, 살라딘이 쿠르드족 출신입니다. 살라딘은 2차 십자군 전쟁 때 등장했습니다. 살라딘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된 결정적인 전투가 하틴의 뿔 전투입니다. 살라딘은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의 기독교 군대를 이곳으로 유인해서 치고 빠지는 기습 작전으로 교란시켰습니다. 하틴 전투가 있었던 곳은 사막 지역으로 낮 기온이 40도 정도였고, 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살라딘의 군사들이 연기를 피워 십자군을 숨 막히게 하고, 밤에는 소음을 내서 잠을 못 자게 했습니다. 병력 규모를 보면, 살라딘의 군대는 3만 명이었고, 십자군은 약 2만 명의 보병과 약 1,000명의 기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무려 17,000명의 십자군이 전사했습니다. 하틴의 뿔 전투에서 승리한 살라딘의 이슬람 군대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습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의 국왕과 협상을 하고 예루살렘을 차지했습니다. 1차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이 이교도에 대해 만행을 저질렀던 것과 달리, 살라딘은 항복한 기독교인들이 도시를 떠나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럽으로 돌아가는 십자군들이 절대 약탈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살라딘의 성정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살라딘은 하틴의 뿔 전투 이후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어서 울고 있는 여인을 보고 그 여인과 함께 울어 주며 함께 남편의 시신을 찾아서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살라딘은 그 여인이 무사히 유럽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습니다. 살라딘은 포로가 된 귀족은 돈을 받고 석방하고, 돈이 없는 노예 포로들은 돈을 받지 않고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무사히 해안가로 가서 본국으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습니다. 살라딘의 관용과 선행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유럽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야만인이라고 무시했던 이교도인이 관용을 베푸는 것에 감동했고, 그들은 살라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살라딘은 단테의 신곡에도 등장합니다.

 

3차 십자군 전쟁에서 만난 살라딘과 리처드 1세

리처드 1세의 사자왕이라는 별명은 사자의 심장을 가진 것처럼 용맹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었습니다. 리처드 1세는 잔혹함과 자비로움, 자만심과 용기를 모두 갖춘 왕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왕이면서 프랑스 해안의 노르망디의 영주이기도 해서 프랑스어를 사용했습니다. 리처드 1세는 3차 십자군 전쟁을 총지휘했는데, 본격적으로 유럽의 왕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보급 즉 재정적인 뒷받침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 성과 통치권을 팔아버렸습니다. 리처드 1세에게는 모든 것을 건 전쟁이었고, 그는 가장 조직적인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기 위한 교두보인 아크레에서 1189년에서 1191년까지 십자군과 이슬람군의 3년간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리처드 1세가 도착하고 단 5주 만에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아크레 공방전이 끝난 후 리처드 1세는 무슬림 포로들을 학살했습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살라딘 군대와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3년 동안 협상하여 3차 십자군 전쟁을 끝냈습니다. 3차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이 계속 다스리고, 해안가에 있는 십자군 왕국의 도시들은 기독교인이 계속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 출입을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살라딘은 리처드 1세가 고열에 시달릴 때 얼음과 약을 보내주고 주치의도 보내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또 살라딘은 전쟁 중에 말에서 떨어진 리처드 1세에게 명마를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살라딘의 관용의 정신과 인성이 잘 드러나는 행동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