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에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힘을 얻어 집정관이 되었고, 이 세 사람은 삼두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에서의 승리로 큰 명성과 부를 얻었고 그의 결단으로 종신독재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카이사르는 뛰어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조금씩 로마 제정 시대를 준비했고,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첫 황제가 되도록 했습니다. 

 

로마 공화정에서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

로마가 현대사에 끼친 영향이 굉장히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공화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 가면 'SPQR'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로마 공화정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로마는 로마 시민과 로마 원로원이 이끄는 나라였습니다. 로마도 다른 도시 국가들처럼 왕정에서 시작했지만 공화정으로 바뀌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타르퀴니우스 왕의 셋째 아들 섹스투스가 로마 최고의 미인 루크레티아를 능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가 있던 그녀의 남편이 돌아와서 복수를 위해 브루투스와 함께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내면서 로마의 공화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의 공화정은 왕이 없는 정부 형태를 말하며, 집정관과 호민관, 원로원이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로마를 이끌어가게 되었습니다. 집정관은 2명으로 구성되고 군을 지휘하며 원로원을 소집할 수 있었습니다. 집정관의 임기는 1년이었습니다. 호민관은 평민 의회 의장으로 민중을 대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원로원은 귀족의 대표자로, 전직 정무관들로 구성되었고, 재무관, 감찰관, 법무관 등이 있었습니다. 원로원은 국고 관리 및 자문을 담당했습니다. 그 외 독재관이 있었는데, 로마 역사에서 독재관은 2명밖에 없습니다. 독재관은 로마가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가 되었을 때 운영하는 임시직인데, 역사적으로 술라와 카이사르가 독재관을 맡았습니다. 독재관의 임기는 6개월이었고,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독재관이 등장하면 집정관은 독재관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집정관이 되고 싶었던 카이사르는 돈이 없었습니다. 선거로 집정관이 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크리수스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크라수스는 로마 최고의 부자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했던 장군이었습니다. 크라수스는 정적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가지고 싶은 땅에 불을 질러서 헐값에 그 땅을 매입하는 비열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한 당시 로마에서 가장 명망있는 군인이었으므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명성을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퇴역 군인들에게 농지를 주고 싶었지만 반대하는 원로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이사르를 돕는 조건으로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되면 농지를 주는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카이사르, 크리수스, 폼페이우스는 연합하여 삼두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서 혈연을 맺었습니다. 집정관의 임기는 1년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1년 동안 퇴역 군인들과 로마 시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주고 인기 있는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에서 종신독재관이 되기까지

갈리아는 유럽 전체에서 영국, 스페인, 독일, 동유럽 제외한 오늘날의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지역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소부족이 많은 나라였는데, 카이사르가 이 지역의 반란을 평정했습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평정하기까지는 8년 정도 걸렸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의 영웅이었는데 카이사르를 마지막까지 상대한 장군이었습니다. 카이사르의 마지막 대혈전이었던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의 부대는 8만 명의 갈리아 지원군과 베르킨게토릭스 부대를 엄호하고자 몰려든 갈리아 부족들 사이에 포위되었습니다. 이때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높이 4미터, 둘레 18km의 성벽을 3주 안에 쌓았습니다. 당시 로마의 병사들은 뛰어난 군인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토목기사이자 건축기사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성벽을 이중으로 만들어서 베르킨게토릭스 군대와 갈리아 지원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로마 10군단이 있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순간을 타개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10군단은 카이사르의 정예부대였습니다. 결국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뛰어난 그의 능력 때문에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갈리아의 지도자에게 로마 원로원의 의석을 나누어주며 보편적인 로마제국을 시작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으로 인해 큰 영광과 함께 많은 부를 축척하였고, 그 부는 부채를 다 갚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갈리아 원정 중에 크라수스가 사망하고,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사망하면서 원로원과 폼페이우스가 결탁하게 되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함께 카이사르를 제거하기로 하고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를 소환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 사실을 알고도 루비콘 강을 건넜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을 처단했습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이 되었는데, 황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죽음과 그의 업적

종신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는 곡식과 농지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의 돈으로 대규모 공사를 시작해서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민들의 빚과 세금을 줄여서 로마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종신 독재관이 된 한 달 뒤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내 폼페이우스 동상 앞에서 공화파들에 의해 암살을 당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암살에 가담한 브루투스와 갈리아 원정대의 부하들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의 광장에서 화장되어 연기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4분의 3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기고,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것과 로마 시민들에게 많은 돈을 나누어 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유언장이 공개되자 실망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였습니다. 폼페이우스를 따라 이집트에 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서 결혼했고 그들 사이에는 카이사르의 유일한 아들인 카이사리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에 대한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실망한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심복이었고 당시 현직 집정관이었기 때문에 후계자의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의 후계자 자리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가자 크게 실망했습니다. 이로써 카이사르의 후계자는 18세의 옥타비아누스가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전쟁이 끝났으므로 정치적으로 로마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군인들이 더 이상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군인인 안토니우스 대신 정치적인 감각이 있는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나중에 최초의 황제가 되었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영토가 확대된 로마에 가장 적합한 통치 시스템이 무엇인지 항상 고민했는데, 로마 공화정은 이미 부패했기 때문에 한 사람의 강력한 통치자가 넓은 제국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준비했습니다. 이것은 황제가 다스리는 정부 형태인 로마 제정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