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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1세 여왕은 엔리케 4세에게 추방당했지만 그녀가 가진 비범함과 현명함으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고,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왕자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국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콜럼버스를 지원한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 여왕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사벨 1세의 여왕이 되기 전 이야기
15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에 이사벨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후안 2세, 그녀의 어머니는 포르투갈 출신인 이사벨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딸 이름이 모두 이사벨이고, 후에 이사벨 1세의 딸도 이사벨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카스티야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면, 카스티야의 왼쪽에 포르투갈이 있고 오른쪽에는 아라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는 그라나다라는 이슬람 제국이 있어서 이베리아 반도는 역학 관계가 복잡했습니다. 이사벨이 어릴 때 그녀의 아버지 후안 2세가 사망했고, 후안 2세의 아들이자 이사벨의 이복 오빠 엔리케 4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엔리케 4세는 어머니 이사벨의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것에 위협을 느껴 가족들을 시골 아레발로로 추방했습니다. 이사벨의 가족들은 왕족의 삶을 살다가 갑자기 시골에서 천민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이사벨은 가난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엔리케 4세에 대한 배신감으로 큰 충격을 받아서 실성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이사벨은 실성한 어머니와 어린 남동생을 돌보면서 가난 속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엔리케 4세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는데, 엔리케 4세 부부에게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러자 귀족들은 그 아이가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귀족들과 이사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사벨을 여왕으로 추대하고자 했습니다. 이사벨에게 여왕이 될 기회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여왕이 된다면 엔리케 4세의 지지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나라가 분열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이사벨은 현실을 직시하고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사벨이 엔리케 4세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는 왕좌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하자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카스티야 왕국은 내전이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스페인 왕국의 탄생 배경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을 후계자로 책봉해 주는 대신 이사벨에게 자신이 정한 남자와 결혼하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엔리카 4세가 정한 남자는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였습니다. 아폰수 4세의 나이는 40대로 이사벨보다 19살이 많았고, 이미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포르투갈에 이미 후계자가 있다는 것이었고, 이사벨에게는 아무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벨은 아폰수 5세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왕이 이웃 나라의 왕과 결혼을 하면, 여왕은 왕의 후계자를 낳는데 열중하고, 통치권을 남편에게 넘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벨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에게 청혼을 하면서 자신을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인정해 달라는 결혼 계약서를 보냈습니다. 아라곤은 카스티야 바로 옆에 있는 나라였고, 페르난도 왕자는 이사벨보다 나이가 1살 적었고 외모가 출중했습니다. 페르난도 왕자도 아라곤 내전으로 인해 이웃 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 역시도 이사벨과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엔리케 4세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사벨이 아폰수 5세와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사벨은 바야돌리드로 도망쳤고,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에게 결혼하자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엔리케 4세의 추격을 피해서 상인으로 변장한 페르난도 왕자는 바야돌리드에 있는 이사벨을 만나러 갔습니다. 바야돌리드에서 페르난도 왕자와 이사벨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5년 후에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이사벨은 카스티야 여왕으로 즉위했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스페인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사벨 1세 여왕과 콜럼버스의 만남
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가톨릭 이외의 모든 종교를 부정했습니다. 1492년에 800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 잡고 있었던 이슬람 왕조가 카스티아와 아라곤의 연합 왕국 스페인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이사벨 1세 여왕은 이슬람을 몰아내기 위해 국토 재정복 운동인 레콩키스타를 벌였고, 마지막으로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술탄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슬람 술탄 보압딜 왕은 항복하면서 알함브라 궁전을 파괴하지 말아 달라 요청했습니다. 이 전쟁은 페르난도가 전방에서 공격하고 이사벨이 후방에서 아낌없이 지원한 덕분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가톨릭 부부의 명예 칭호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통일 스페인의 경쟁국은 포르투갈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엔히크가 아프리카 서해안을 개척하여 신항로 개척에서 스페인을 앞서 있었습니다. 경쟁국 포르투갈이 강해졌다는 것은 스페인에게 위협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사벨 1세 여왕은 해양제국 건설을 꿈꾸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만났습니다. 콜럼버스는 인도 항로를 개척할 계획을 세우고 여러 국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기꾼이라는 오명까지 써야 했습니다. 그때 이사벨 1세 여왕은 콜럼버스의 말을 경청하고 콜럼버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이사벨 1세 여왕에게 항해와 탐험 비용 전액에 대한 투자와 발생하는 수익의 10%를 자신에 분배해 줄 것과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페르난도와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이사벨 1세는 자신의 왕관까지 팔아서 콜럼버스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선박 2척과 많은 선원, 항해 기술자를 모집해 주었습니다. 콜럼버스가 네 번의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산살바도르 지역이었고, 이 항해로 처음부터 수익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발견으로 인해 스페인은 나중에 해상강국이 되었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모두를 식민지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벨 1세 여왕은 이후 5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하는 스페인 제국의 시대를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