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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중반, 일본의 중앙 집권 체제가 무너지면서 귀족들의 필요에 의해 등장했던 사무라이는 점점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권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사무라이는 일본에서 막부 정치를 펼쳤고, 오닌의 난 이후 결과적으로 전국 시대를 초래했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에 대한 개론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국은 일본이 패전이 확실히 예상되는데도 항복하지 않으면서 군인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문화 인류학자였던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에 대해 연구해 볼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국화와 칼>은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을 가보지 않고 쓴 책입니다. 책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을 평화를 추구하면서 폭력성이 있는 나라라고 하며 일본의 이중성에 대해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국화 가꾸기에 몰두하는 동시에 칼을 숭배한다고 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 세 명을 지목하라고 하면 히틀러, 무솔리니, 일왕이었던 히로히토를 들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마지막에 자살했고 무솔리니는 처형당했지만, 히로히토는 신변이 보장되며 그의 후손들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일본에는 국화와 더불어 일본을 상징하는 꽃이 있는데 바로 벚꽃입니다. 벚꽃은 환생과 생명을 상징하고, 사무라이 정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무라이는 섬기는 자를 의미하는 말로 그들은 귀족을 섬기면서 그 귀족들에게 토지를 받았습니다. 지방에서의 사무라이는 작은 토지의 영주이기도 했습니다. 사무라이와 뗄 수 없는 것은 칼인데, 그들은 항상 칼을 소지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외출할 때 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처벌을 받았습니다. 사무라이에게 가장 영예로운 죽음은 할복인데, 사무라이는 배 속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가르면 그 사람의 영혼이 깨끗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사무라이가 할복할 때에는 갖추어야 할 격식이 있었는데, 죽기 전에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언장에는 주인의 명예를 위한 죽음이므로 가족을 부탁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일본 사무라이의 등장과 막부 정치
일본의 중세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헤이안 시대인데, 헤이안 시대의 최고 세도 가문이 후지와라 가문입니다. 후지와라 가문의 문장은 등나무로, 등나무의 특징인 넝쿨이 올라가는 것처럼 가문의 번영을 상징합니다. 후지와라 가문은 가문의 딸을 일본 천왕가에 시집보내면서 최고의 외척 가문으로 권력을 누렸습니다. 후지와라 가문의 세도는 섭관 정치를 통해서 최고의 명문 가문을 이어나갔습니다. 섭관 정치는 헤이안 시대에 섭정과 관백이 주도한 정치 형태로 셋칸시이지라고도 합니다. 섭정이란 천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를 하면 아직 정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으므로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데, 외척이었던 후지와라 가문에서 담당하였습니다. 후지와라 가문이 천왕의 권위를 가지고 나라를 대신 통치하며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 어린 천왕이 자라서 성인이 되면 섭정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권력을 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그들은 관백이라는 직위를 겸하게 됩니다. 관백은 일본의 천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직위였습니다. 그래서 섭정에서 물러나더라도 권력을 놓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후지와라 가문이 섭관 정치를 하는 동안 천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율령 체제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지방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귀족들은 도적들과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로부터 재산과 집안을 지키기 위해 사무라이, 즉 무사 집단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 사무라이가 등장하였습니다. 헤이안 시대의 대표적인 사무라이 가문으로 겐지 가문과 헤이시 가문이 있었습니다. 두 가문이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전쟁이 바로 일본 역사상 유명한 전쟁인 겐페이 전쟁입니다. 겐페이 전쟁은 5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겐지 가문이 승리를 하게 되었고, 이후 사무라이들이 귀족들을 제치고 직접 일본을 통치하면서 막부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사무라이들이 나라를 다스린 것을 일본의 막부 정치라고 합니다. 겐페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무라이의 수장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인데, 그는 일본 무사 정권의 창시자로 최초의 쇼군이 되었습니다. 쇼군은 일본 역사에서 막부의 수장을 일컫는 말이고, 요리토모는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를 세웠습니다. 그 이후에는 겐지 가문과 직계나 방계, 외척 등의 관련된 사람만 쇼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특유의 사회 구조를 가지는데, 일왕은 쇼군을 임명할 수 있는 권위만 가지고, 그 외의 모든 권력은 쇼군이 가집니다.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이런 사회적인 구조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센고쿠지다이, 전국 시대의 시작
아사카가 요시마사는 가마쿠라 막부 이후 두 번째 막부인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입니다. 요시마사는 감성이 풍부하여 정원 가꾸기, 다도, 꽃꽂이를 좋아하여 쇼군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무능하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히노 도미코는 요시마사의 아내로 일본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요시마사에게는 쇼군을 물려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절에 출가했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미를 불러들여서 쇼군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시마사의 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도미코는 아들에게 쇼군을 물려주고 싶어서 요시히사에게 야마나 소젠을 후견인으로 세웠습니다. 요시미는 호소가와 가쓰모토와 힘을 합쳤습니다. 그래서 쇼군의 후계 자리를 놓고 슈고 다이묘들이 교토에서 전쟁을 벌였는데, 바로 오닌의 난입니다. 교토의 가장 중앙의 길을 기점으로 해서 오른쪽을 동군, 왼쪽을 서군이라고 했고, 오닌의 난은 11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야마나 소젠이 이끄는 서군의 군대는 11만 명이었고, 호소가와 가문이 이끄는 동군의 군대는 16만 명이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다이묘들이 교토로 몰려들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요시마사는 교토의 은각사에서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닌의 난에서 요시히사가 결국 승리했습니다. 오닌의 난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일본에서 다이묘가 슈고 다이묘에서 센코쿠 다이묘로 전환되는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슈고 다이묘는 쇼군이 임명한 지방관을 일컫는 말이고, 센코쿠 다이묘는 슈고 다이묘들이 오닌의 난에 참가하기 위해 교토로 떠나면서 자신의 영지를 맡긴 대리인입니다. 오닌의 난이 10여 년 동안 지속되면서 대리인들이 자신의 주군을 배신하고 영지를 빼앗은 것입니다. 센코쿠 다이묘들이 활약했던 시대가 일본의 전국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