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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주교 임명권을 두고 대립하다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이긴 사건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교황이 승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의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교황과 황제의 대립의 역사

카노사의 굴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속에서 교황과 황제의 관계가 어떤 변화와 대립을 거듭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토 1세는 당시 이탈리아를 침공한 헝가리의 마자르족을 격퇴했고, 교황은 이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황은 로마를 방문한 오토 1세에게 황제의 대관식을 해 주었습니다. 962년, 이때부터 신성로마제국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오토 1세는 제후들의 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고민을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직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성직자들에게 봉토를 수여하고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황제는 또한 성직자에게 관직을 부여하고 성직자를 임명하기 시작했습니다. 11세기 무렵의 신성로마제국의 영역은 독일, 오스트리아, 북부 이탈리아 지역이었습니다. 오토 1세는 작센의 제후였고, 하인리히 4세는 프랑켄 공작령 제후의 아들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명예직이었고, 황제는 독일의 7명의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의 후임을 천거할 수 있었으나 황제의 혈통이 끊어지면 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제후들이 황제를 몰아내고 다른 황제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제후들의 세력을 누르고 황제권 강화를 위해 고민했습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교황은 로마 대주교로 가톨릭교 최고의 성직자입니다. 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을 교구라 하는데, 세계 5대 교구는 알렉산드리아 교구, 예루살렘 교구, 안티오크 교구, 콘스탄티노플 교구, 로마 교구였습니다. 5개 교구 중에 안티오크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예루살렘 교구는 이슬람 점령 지역에 있었고, 기독교 지역에 있는 교구는 로마 교구와 콘스탄티노플 교구였습니다. 기독교 지역의 두 교구는 경쟁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를 이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승부의 결과는 로마 교구였는데, 로마 교구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며, 로마는 유명한 순교자인 베드로와 바울의 출생지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교구의 위쪽에는 게르만족인 프랑크 왕국과 서고트 왕국이 있었는데, 로마 교구가 게르만족에게 기독교를 가장 많이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구의 위상이 콘스탄티노플 교구보다 높았고, 로마 교구가 서유럽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더 컸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구의 주교를 교황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지방에 있는 성직자와 신자들이 로마 교구의 주교를 선출했지만, 로마의 주교가 교황이 되면서부터 유력한 제후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선출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성직자의 서임권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의 전개와 결과

카노사의 굴욕은 하인리히 4세가 밀라노의 대주교를 자신의 측근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으로 개혁가였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이 되면서부터 교회 개혁을 위해 3가지를 실천했습니다. 성직의 매매를 금지하고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고, 교회가 서임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먼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켰고, 한 달 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습니다. 서양 중세 시대에는 파문당하면 이교도로 취급받았고, 황제가 파문을 당하면 모든 백성과 신하들이 복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수많은 독일 제후들이 더 이상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전 지역에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교황은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카노사성으로 피신해 버렸습니다. 카노사성의 성주는 마틸다였는데, 하인리히 4세는 마틸다에게 교황과의 만남을 간청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영리해서 파문을 거두기 위해서는 교황의 동정심을 자극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황후와 아이를 데려가서 같이 사정했습니다. 이에 교황은 황제에게 더 이상 교황청에 간섭하지 말라는 조건을 걸고 파문을 철회했습니다.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만약 추운 곳에서 맨발로 용서를 구하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교황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뜻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가 황제 하인리히 4세를 만찬에 초대했는데, 하인리히 4세는 만찬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겉으로는 굴복했지만 속으로는 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후 하인리히 4세는 독일 제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교황 편에 있던 제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리고 하인리히 4세는 제후들과 주교들의 힘을 모아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고 클레멘스 3세를 옹립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의 진정한 승자, 카노사의 마틸다

1122년에 하인리히 5세와 교황 가리스토 2세가 보름스 협약을 체결하면서 속세와 교회의 권력이 대타협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임권은 기본적으로 교회가 행사하지만 성직자 선출 시 황제나 대리인이 입회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카노사의 굴욕은 결국 황제의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노사의 굴욕의 진정한 승자는 마틸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3세에 의한 마틸다의 굴욕이 있었습니다. 마틸다의 어머니 베아트리체는 토스카나 영주와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일찍 사망했습니다. 그 후 베아트리체가 재혼한 남편이 하인리히 3세에게 반항하다가 가문이 멸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마틸다의 새아버지는 도망가고 그녀의 어머니 베아트리체는 하인리히 3세에게 무릎을 꿇고 영지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곡히 빌었습니다. 이 모습을 마틸다가 지켜보았습니다. 그로부터 22년 후에 카노사성에서 하인리히 4세가 마틸다에게 무릎을 꿇고 간절히 애원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지하에 베드로가 있고, 그와 가장 가까이에 마틸다 무덤이 있습니다. 마틸다의 무덤은 지하에 있는 유일한 여성 무덤입니다. 베르니니는 마틸다의 관에 카노사의 굴욕의 한 장면을 부조로 새겨놓았습니다. 베르니니는 카노사의 굴욕의 중심인물이 마틸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틸다는 카노사성에서 숨을 거두었고, 마틸다 사망 후 600년이 지난 후에 교회가 마틸다의 무덤을 이곳에 조성했습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교회에 대한 그녀의 기여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틸다는 자식이 없어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영지를 교회에 기부했습니다. 마틸다가 있었던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