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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 터브먼은 미국 남부의 목화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였지만 필라델피아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천했던 인물입니다. 그녀는 미국 남부 흑인들의 탈출을 위해 행동했으며, 미국 남북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습니다. 그녀는 남북 전쟁에서 북부의 승리에 기여했지만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전념했습니다.

 

해리엇 터브먼의 노예로서의 삶과 자유를 위한 탈출

해리엇 터브먼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프리카에서 흑인 사냥을 당해서 강제로 미국으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해리엇 터브먼의 부모도 미국 남부의 목화 농장의 노예였고, 그녀도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노예들은 주인으로부터 학대와 구타를 당하면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녀는 15세 때 도망치는 노예를 도와주다가 주인에게 둔기로 머리를 맞아서 이마 뼈가 함몰되었고 평생 수면 발작에 시달렸습니다. 해리엇 터브먼은 무엇보다도 노예의 삶이 대물림된다는 사실이 더 끔찍했습니다. 흑인이 노예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리엇 터브먼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겠다고 결심했고, 자식에게 노예의 삶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당시 미국 남부는 흑인 노예의 노동력으로 목화 농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남부에서는 노예 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반면 미국 북부는 산업화를 이루어서 노예가 아닌 임금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미국 북부는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주가 점점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리엇 터브먼은 미국 북부 필라델피아로 몇 번의 탈출을 시도했고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29세의 나이로 해리엇 터브먼은 자유 주로 가는 경계선에서 두 손을 펼치며 자유가 있는 이곳이 천국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자유를 가족과 친구, 함께 있었던 흑인 노예들도 누리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하철로의 차장, 남부의 흑인 노예 탈출시키기

해리엇 터브먼은 자신의 아픔에 자각을 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을 하며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북부에서는 소수의 백인과 노예 해방을 한 흑인들이 미국 남부 지역의 흑인 노예들을 탈출시키는 일을 하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은어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조직을 지하철로라고 불렀습니다. 실제 철로나 기차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남부에서 노예를 탈출시켜서 북부로 가는 길을 철로라고 했으며, 남부에서 탈출한 노예가 북부로 오면 그 노예를 숨겨주는 역할을 하는 조력자의 집을 역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남부의 농장에서 노예를 탈출시키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차장이라고 불렀습니다. 해리엇 터브먼은 지하철로의 가장 위대한 차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청소부나 잡역부의 일을 하면서 성실하게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해리엇 터브먼은 봄과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사비로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북부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해리엇 터브먼이 할머니 변장을 하면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300명이 넘는 흑인들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흑인 노예들이 탈출하면서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격려하고 재촉하며 무사히 미국 북부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인도했습니다. 해리엇 터브먼은 자신만 자유를 누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흑인 노예들도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돕는 데 헌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남북 전쟁에서 대활약과 해리엇 터브먼의 집

1861년에 미국의 남부와 북부는 경제 문제와 노예 문제로 대립하면서 결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남북 전쟁에 북부의 승리는 흑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생존과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이었습니다. 해리엇 터브먼은 남북 전쟁에서 북군에 복무하며 요리사, 간호사, 무장 정찰병, 스파이 역할까지 다양하게 활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면서 700명이 넘는 노예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노예들에게 해리엇 터브먼은 자유를 맛보게 한 모세와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녀가 구출한 노예들은 다시 북군에 입대해 전쟁에 힘을 보탰습니다. 북부의 군인들은 해리엇 터브먼을 터브먼 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1865년에 남북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끝난 후에도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해리엇 터브먼도 남북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고, 흑인들은 법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았지만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1908년, 해리엇 터브먼은 '해리엇 터브먼의 집'이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흑인 여성들의 정착과 경제적인 자립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19세기 말에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없었기 때문에 해리엇 터브먼은 여성 참정권 운동에 가장 먼저 앞장섰습니다. 그녀는 살아있을 때도 흑인 여성으로서의 활약에 유명했지만, 사후에 더욱 사랑받았습니다. 해리엇 터브먼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고, 후세의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