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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영웅이자 전설적인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약탈 허가증을 받아서 합법적인 해적 활동으로 스페인의 선박을 약탈하여 얻은 재물을 영국 왕실에 헌납하고 기사 작위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시켜 대영 제국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

해적은 바다에서 선박으로 이동하면서 다른 선박이나 해안 지역을 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을 일컫는 말입니다. 대항해 시대에는 국제 해상 무역이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당시 통제가 불가능한 영해의 관리를 위해 영국과 유럽 국가들은 해적들이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도록 해적들에게 허가증을 발급했습니다. 해적의 약탈 대상은 적국의 선박이었습니다. 후에 국가 기반 시설이 정비되면서 각 국가들은 약탈 허가증을 더 이상 발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해적들은 불법으로 계속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1540년에서 1596년까지 실존한 인물로, 기동성과 정보력을 가지고 카리브해를 호령했습니다. 드레이크는 영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플리머스에서 12형제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해 바닷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 드레이크는 존 호킨스를 만나서 항해술과 선박을 관리하고 수리하는 법, 선원들을 다루는 방법, 그리고 스페인 선박을 약탈하는 법까지 배웠습니다. 그 당시 해적들은 주로 스페인의 선박을 노렸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았고,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의 많은 황금과 귀중품을 스페인 선박을 통해 스페인으로 가져갔습니다. 멕시코 역시 스페인의 식민지로 멕시코의 많은 황금이 파나마 해협을 통해 카리브해를 지나서 스페인으로 이동되었습니다. 그래서 해적들은 파나마 해협에서 버티고 있으면 스페인 선박을 공격해 약탈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카리브해는 섬이 많아서 해적들은 보물을 숨길 곳과 은신처로 사용할 장소도 많았습니다. 해적 드레이크는 영국에서 약탈 허가증을 받아서 합법적으로 스페인의 선박을 약탈했습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활약상

해적에게 필요한 것은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이었습니다. 1557년 12월 13일, 드레이크는 영국 남부의 프리머스 항구를 출발했습니다. 그는 5척의 배를 이끌고 대서양을 나섰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드레이크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알현하고, 여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왕의 명령은 스페인 선박을 약탈하고, 태평양에 있는 땅을 탐험하고, 남미에 있는 원주민과 교역로를 확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레이크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서 남미 서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마젤란 해협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5척의 선단은 남극과 남미 사이를 통과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고 도중에 폭풍도 만나고 선상 위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드레이크는 원주민과 교역을 시도하다가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서 얼굴에 화살을 맞기도 했지만 모험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드레이크가 항해했던 곳을 드레이크 해협이라고 합니다. 골든 하인드호를 타고 있던 드레이크는 칠레 해역에서 스페인 선박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배에는 2만 5천 페소의 페루산 금이 실려 있었고 약탈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6톤의 은과 80파운드의 금이 실려있는 또 다른 스페인 선박을 약탈하여 총 20만 파운드의 재물을 획득했습니다. 이에 스페인은 중간 길목에서 골든 하인드호를 잡기 위해 수많은 함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드레이크는 스페인 함대를 피해서 마젤란이 먼저 갔던 대로 캘리포니아 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진격했습니다.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사망했지만, 드레이크는 그 길을 따라 처음으로 2년 7개월 만에 세계 일주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절대군주였던 펠리페 2세는 드레이크에게 현상금까지 내걸었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펠리페 2세는 영국 여왕에게 드레이크를 스페인에 넘겨주거나 당장 사형시키라고 협박했지만 영국 여왕은 오히려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즉위했을 당시 영국은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드레이크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바친 재화의 금액으로 대외 부채를 갚고도 남아서 동인도회사의 전신인 레반트 회사에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은 유럽의 왕족들 중에서 가장 많은 보석을 소유했는데, 그것은 모두 해적왕 드레이크가 여왕에게 바친 것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의 시작, 칼레 해전의 승리

멕시코의 항구 도시 베라크루스에는 '산 후안 데 울루아'라는 스페인 요새가 있었습니다. 스페인이 이곳에 요새를 만든 이유는 스페인이 멕시코의 수많은 보물과 황금을 실어 나를 때 사용했던 항구가 베라크루스였는데, 보물과 황금을 노린 수많은 해적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해적들로부터 자국의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존 호킨스와 드레이크는 베라크루스 주변 해역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선박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고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이후 드레이크는 스페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반 스페인 정책을 펼치면서 해적 드레이크를 옹호하고,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를 지원해 주었으며, 펠리페 2세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은 불가피했습니다. 영국은 80척의 전함과 8,000명의 수병을 보유했는데, 전함은 해적들의 배였고 수병을 이끈 사람은 해적 선장이었습니다. 반면,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130척의 전함과 8,000명의 수병, 18,000명의 보병, 그리고 2,000문의 대포를 출전시켰습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격전에서 부사령관을 역임하며 해적들의 전형적인 전술인 치고 빠지기 기술을 펼쳤습니다. 당시 스페인 무적함대는 영국의 전력에 수많은 피해를 입고 네덜란드 주둔군과 합류해서 영국 상륙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드레이크가 밤에 칼레항에 입항해서 정박 중이었던 스페인의 함대에 불붙은 선박을 보내서 불로 적을 공격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칼레 해전으로, 세계 3대 해전 중 하나입니다. 세계 3대 해전으로는 살라미스 해전과 트라팔가르 해전, 칼레 해전이 있습니다. 칼레항에서 스페인은 큰 손실을 입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북쪽으로 도망갔지만 폭풍우를 만나서 수많은 무적함대가 궤멸되고 겨우 수천 명만이 살아서 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1588년 칼레 해전에서의 승리로 대영제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패배는 스페인이 독차지했던 해상 무역권을 영국에게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역사의 전환점에 해적 드레이크가 있었습니다. 드레이크는 55세의 나이에 이질로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져 포르토벨로에서 수장되었습니다.